가장 큰 진실은 ‘몸의 진실’이라고 생각한 모로코 출생 프랑스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 부커상 누리집
좋아하는 신화가 있다. 신들의 금기를 깨고 불을 훔쳐 인간에게 건넨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다. 불씨를 들고 인간에게로 향하는 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그는 몸이 타들어 간다고 해도 불을 내려놓을 수 없을 것이다. 꺼뜨려서도, 통제할 수 없이 번지게 해서도 안 되니까. 그에게 중요한 질문은 하나다. 그 불을 들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여기, 불을 들고 가는 여자가 있다. 금기의 이야기를 쥐고 나아가는 자, 레일라 슬리마니다.
릴게임갓 슬리마니는 1981년, 모로코 라바트에서 태어났다. 당시 모로코는 이미 독립국이었지만, 행정, 교육, 문화 영역에서는 프랑스어가 절대적 우위를 차지했고, 상류층의 정체성도 프랑스 문화 안에서 형성됐다. 하지만 가정에서는 달랐다. 전통적 규범과 가부장적 질서가 여성의 몸과 욕망을 강력하게 통제했다.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 허용된
릴게임사이트추천 몸과 통제된 몸이 한 사람 안에서 부딪힌다면 어떻게 될까. 그 충돌은 어린 슬리마니 안에서 두 개의 돌처럼 맞부딪혀 불꽃을 일으켰고, 그것은 훗날 그의 문학을 타오르게 하는 첫 불씨가 된다.
자유를 선망하며 동시에 몸을 통제하는 사회에서 마주하는 가치관의 충돌은 결코 관념의 차이로 끝나지 않는다. 특히 여성에게 그렇다. 여성에게 그 충돌은
릴게임예시 언제나 몸으로 도착한다. 욕망을 인식하면서도 비난이 두려운 이의 경직된 어깨, 오므라든 다리, 가늘어지는 호흡으로. 여성의 몸은 세계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감각하고, 그 감각은 금기의 공기, 억눌린 욕망이라는 형태로 신체에 저장된다. 그래서 슬리마니의 인물들은 모두 몸으로 존재한다. ‘그녀, 아델’의 주인공은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공포 때문에, 몸을 확
야마토게임예시 인하기 위해 가장 극단적인 방식, 끊임없는 섹스로 몸을 몰아붙인다. ‘달콤한 노래’에서 루이즈의 파국 뒤에는 돌봄 노동으로 지친 몸, 억눌린 욕망, 고립감이 축적된 신체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몸으로 읽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의 텍스트는 ‘몸을 통해 세계를 인지한 기록’이기 때문에 독자 역시 그 감각을 따라가며 읽게 된다. 슬리마니의 텍스트도
황금성릴게임사이트 그렇다.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신체로 반응한다. 인물의 호흡, 위축, 긴장, 열망이 서사 속에서 감각 그대로 전달된다.
슬리마니는 가장 큰 진실은 ‘몸의 진실’이라고 했다. 존재의 지극히 육체적인 차원이 그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소설을 쓸 때 먼저 인물이 어떤 몸을 가졌는지를 상상한다. 키, 체력, 먹는 음식, 피부 같은 조건들이 소설 속 인물의 세계관을 결정한다. 그러니 슬리마니가 구축하는 서사는 결국 한 사람의 몸에 새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슬리마니의 ‘몸의 진실’은 자연스럽게 ‘모성’이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모성이야말로 감각과 육체성의 총체이며, 몸이 가장 크게 열리고 가장 깊게 상처받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임신으로 장기가 밀리고, 출산으로 신체가 찢기고, 수유와 육아로 수면과 식사가 무너진다. 애정과 피로, 책임과 불안이 신체적 반응으로 밀려들며, 그 모든 것은 추상적 감정보다 먼저 몸이 반응하는 경험이 된다. 슬리마니가 모성을 ‘침투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인 경험’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달콤한 노래’를 보자. 보모가 아이들을 살해한 사건을 다루지만, 소설의 중심에는 슬리마니가 바라보는 모성이 있다. 보모, 루이즈와 엄마, 미리암은 계급과 조건은 다르지만, 모성이라는 동일한 장 안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작동한다. 전문직 여성인 미리암은 출산 뒤 자신의 몸과 정신이 타인의 요구에 종속되는 경험을 한다. 아이의 울음에 반응하는 신체, 직업적 욕망과 육아 노동의 충돌, 좋은 엄마여야 한다는 압박. 한편, 루이즈는 모성을 수행하지만, 엄마가 아닌 여성, 돌봄 노동 속에서만 존재가 인정되는 여성이다. 그의 몸은 쓸모로만 인정된다. 결국 두 여성 모두 모성 아래에서 자유를 상실한 몸이라는 점에서 연결된다.
슬리마니는 모성을 축복이 아니라, 사회가 부여하는 가장 강력한 규범으로 바라봤다. 엄마이기 때문에 느끼는 사랑이 아니라, 엄마이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구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때, 보이는 세계 뒤에 숨은 폭력을 들춰내는 그의 글쓰기는 금기의 내부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가 된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들고나온 것처럼, 슬리마니는 사회가 덮어둔 모성의 이면, 금지해온 여성의 욕망, 돌봄의 고통을 들고나온다. 가장 안쪽, 뜨겁고 위험한 곳까지 몸을 들여놓는다.
올해 1월 프랑스 출판사 갈리마르에서 출간된 레일라 슬리마니(44)의 소설 ‘나는 불을 들고 갈 것이다’의 표지. 2020년 3부작으로 기획 시작된 ‘타인들의 나라’의 마지막 편이다.
슬리마니는 누구도 쉽게 다루지 못하는 주제들, 말하는 순간 자신도 상처 입게 되는 것들을 불씨처럼 움켜쥔다. 신작 ‘나는 불을 들고 갈 것이다’를 펴낸 슬리마니는 ‘사람이 떠날 때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라는 질문에 ‘내면의 불’이라고 대답한다. 그에게 내면의 불이란 타인의 시선, 자기 안의 두려움을 견디면서도 금기와 폭력의 진실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 바로 글이 아니겠는가. 그 불을 들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어쩌면 질문의 답은 슬리마니가 아니라 우리의 몫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계의 어둠을 직시할 수 있을까. 솔직하기에 폭력적인 진실을 견딜 수 있을까.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문명과 고통을 함께 가져온 이중적 선물이었음을 기억하자. 슬리마니의 불도 다르지 않다. 진실과 고통은 언제나 함께한다. 그러니 마지막 질문은 결국 하나다.
당신은 이 불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신유진 작가
신유진 작가·번역가 기자 admin@seastorygame.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