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최근 정부가 두 차례 추가경정예산(추경)을 거쳐 영화, 애니메이션 등을 제작하는 ‘인공지능(AI) 콘텐츠 제작 지원’에 375억 원을 편성하는 걸 보고 공연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연예술 분야는 AI 창작·제작을 위한 정부 지원이 전무하다시피 해 AI 활용이 난망하기 때문이다. 공연계 관계자는 “무대 예술에도 AI를 접목할 수 있는 분야가 늘어나고 있는데, 자비로 전문 인력과 장비를 쓰자니 워낙 고가여서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정부 지원이 없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경제, 사회 전반에서 ‘인공지능(AI)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AI 활용이 급증하고 있지만, 공연계는 강 건너 불구경이다. 문체부가 수백억 원 규모의 AI·융복합콘텐츠 예산을 운영 중이지만, 공연예술 생애최초주택구입자금대출필요서류 분야는 지원대상에서 사실상 제외돼 있다. 창작자들이 AI를 활용할 수 있는 정부의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연계, AI 창작 지원·제작비 보조 ‘전무’
19일 공연계와 문화체육관광부 등에 따르면 공연예술 분야의 AI 지원 사업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체부 관계자는 “다양한 분야에서 AI 활용이 늘 월차 연차 어나는 만큼 문화예술계에도 관련 지원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갖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아직까지 공연예술 분야에 대한 AI 지원사업은 없다”고 밝혔다.
문체부의 2026년도 예산안을 보면 AI 콘텐츠 제작 지원 예산은 238억 원으로 올해(80억원)보다 158억 원 늘었다. AI 특화 콘텐츠 아카데미 신설에는 192억 원이 배정됐고, AI 카드할부캐피탈할부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문화기술 연구개발(R&D) 예산은 역대 최대 규모인 1515억 원을 편성했다. 하지만 이는 영화, 애니메이션 등 영상 분야 AI 콘텐츠 육성을 위한 예산으로, 공연예술 분야는 전무하다.
영상 분야에서 정부 지원 성과도 나오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콘진원)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국내 최초 AI 장편영화 ‘중간계’가 정부학자금대출조회 최근 개봉했다. ‘카지노’ ‘범죄도시’ 등으로 유명한 강윤성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변요한, 김강우, 방효린 등이 출연한 작품이다. 배윤경 주연의 AI 영화 ‘젠플루언서’도 촬영에 돌입했다.
그나마 공연 분야에선 예술경영지원센터(예경)가 지원하는 ‘오픈이노베이션’ 일부 과제에서 기업이 AI를 활용하는 사례가 눈에 띄는 정도다. ‘오픈이노 카드론이란 베이션’은 예술기업과 기술 선도기업이 협력하는 프로젝트를 일컫는 말이다. 지난해 기술 선도기업 7개사·예술기업 10개사가 참여한 데 이어, 올해는 선도기업 6개사·예술기업 8개사가 선정됐다. 공간음향 제작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오디오가이’, AI 기술로 광고·뮤직비디오 등을 제작하는 ‘이리온’ 등이 포함됐다.
하지만 이는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메타버스, 버추얼 IP 등 신기술을 무대와 접목한 융합형 프로젝트로, 주로 전시·체험형 콘텐츠 개발에 집중돼 있다. 무대 위에서 활용할 수 있는 창작 지원이나 제작비 보조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래픽=이미나 기자).



“AI 활용한 창작, 공연 시장 확대 촉매 될 수도”

공연계도 AI 시대를 맞아 새로운 형태의 무대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최근에는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이 AI 기술을 활용한 창작 국악 공연 ‘그리고 잇다’를 무대에 올렸다. 예술단은 이 무대에서 ‘월하정인’ ‘무동’ ‘쌍검대무’ 등 AI로 작곡한 음악을 최초 공개했다. 지난 6월에는 극작과 작곡 과정에 AI를 활용한 뮤지컬 ‘보이스 오브 햄릿’이 무대에 올랐다. 셰익스피어의 고전 ‘햄릿’을 콘서트 형식의 1인극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옥주현, 신성록, 민우혁, 김려원이 햄릿으로 출연한 작품이다.
하지만 AI를 활용한 새로운 창작 시도를 지속하기엔 비용 부담이 크다. 단순히 챗GPT를 구독하는 수준이 아니라, 영상·음향·그래픽 데이터를 가공하고 렌더링(컴퓨터가 영상을 완성 이미지로 변환하는 것)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음악·음성 합성 프로그램인 iZotope RX의 경우 월 최대 100만 원의 구독료와 함께 별도의 라이선스 비용이 든다. 공연계 관계자는 “하나의 영상을 만들기 위해 10개 안팎의 AI 프로그램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며 “AI 작업을 수행하는 편집 전문가 등 2~3명의 인건비도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AI를 활용한 공연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시장 규모를 키우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박은지 태재대 AI융합전략대학원 교수는 “관객들에 신선한 경험을 줄 수 있어 공연장으로 유인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며 “AI를 활용하면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이미지와 영상을 제작하는 것이 가능하다. 관객의 의견을 반영해 즉시 수정, 보완할 수 있다는 점도 AI 활용의 큰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서울문화재단의 ‘2024 서울시민 문화향유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서울시민 약 45.7%는 ‘AI 관련 전시·공연을 보고 싶다’고 답했다. 관람료를 지불할 의향이 있다는 응답도 35.9%에 달해 AI 시대 새로운 형태의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보여줬다.
전문가들은 “창작자 자율에 맡기되, 관객의 기대를 충족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지원체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설동준 프로젝트 퍼플비 대표는 “AI 콘텐츠 지원이 기본적으로 영상·디지털 예술을 중심으로 이뤄지다 보니, 현장 중심인 공연예술 분야의 지원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게 사실”이라며 “확실한 지원 체계가 있다면 공연예술계에서도 AI를 활용한 무대작업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예술가 양성 과정에서부터 AI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김민지 서강대 퓨처랩연구소 전임연구원은 “대학에서 예술 관련 전공 학생들을 위한 인공지능 수업, 커리큘럼이 마련돼야 한다”며 “그래야 이들이 예술가로 활동하게 됐을 때 최신 기술을 공연에 접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AI 창작 국악곡을 선보인 관현맹인예술단의 ‘그리고 잇다’ 공연 모습(사진=이윤정 기자).


이윤정 (younsim2@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