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준성 의병부대가 활동한 두륜산과 대흥사 전경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다는 정미7조약 '부수각서'에 따라 부대 해산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서울 시위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당일 자결했다. 중대장 오의선 정위도 뒤를 따라 자결했다. 남상덕 참위는 부하들을 이끌고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했다. 해산군인들이 나아가야 할 목표를 제시한 셈이다.
8월 9일 광주진위대를 비롯해 지방의 진위대들도 해산됐다.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항쟁은 '대규모', '조직적'인 의병 전쟁으로 발전했
다. 서울 시위대로부터 시작된 해산군인들의 항전은 원주·강화·홍주·진주 진위대로 확대됐다.
장교나 병을 막론하고 대한제국 군인들은 대부분 의병부대에 합류하거나 새로이 의병부대를 결성했다. 이들이 의병부대에 가담함으로써 의병 전투력은 크게 강화됐다.
황준성 의병부대가 활동한 두륜산 대흥사 전경.해남군 제공
완도, 해남 일대를 주름잡던 유명한 황준성 의병장 또한 대한제국 장교 출신이었다. 황준성은 군대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의병에 가담한 죄목으로 내란죄로 완도로 유배형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유배지에서 의병을 일으
켜 일제의 간담을 소스라치게 했다.
해남 대흥사에 속한 심적암이 바로 황준성 의병장이 활동한 항일운동의 성지(聖地)라는 사실을 아는 이 많지 않다. 이번 남도 의병 열전에서는 이곳을 무대로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 전쟁을 살펴본다.
황준성 의병부대가 전열을 정비한 달마산 미황사.해남군 제공
◆유배지서 이어간 항일 투쟁 의지
1897년 전북 진안군 남면 오정리에서 태어난 황준성은, 대한제국 군대의 참령 직급까지 올랐다. 참령 이상으로 의병장이 된 인물은 이동휘와 황준성 뿐이다.
황준성은 1907년 12월 최익현,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 의병에서 윤현보·이봉오·추기엽 등과 함께 참전했다가 유배형 10년을 받고 전남 완도로 이송됐다.
승정원 일기에는 '평리원(1907년 12월 말까지 존속한 대한제국 최고 재판소), 피고 황준성을 정사(政事)를 변경하기 위해 난을 일으킨 자로 사형에 처해야 하나 그 사정을 살펴 감경해 유형(流刑) 10년에 선고한다'고 나와 있으며 순종실록에도 '평리원에서 심리한 순천군 의병 황준성을 유형(流刑) 10년에 처했다'고 나와 있다.
완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황준성은, 이봉오·추기엽 등이 전주지방재판소에서 10년 유배형을 받고 완도로 오자 1909년 6월 유배지를 이탈해 의병 투쟁에 나섰다.
이때의 모습을 당시 판결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피고(황준성)는 융희 원년(1907년) 12월 25일 내란죄로 인해 유배형 10년에 처해져 전라남도 완도에 유배돼 그 집형(執刑) 중에 전남 각 지역에서 폭도의 봉기가 있음을 기회로 해 그 수괴 강성택과 연락해 1909년 6월 유배지를 탈출해 강성택의 부하 십여 명과 함께 각각 총을 휴대하고 완도군 고금, 청산, 여호의 각 섬 및 해남군 화이면의 각 부락을 휘젓고 다녔다. 다음 7월 7일 해남군 북종면 이진리에 이르러 그 지역에서 폭도 수괴 추기엽 및 황두일과 그 부하 10여 명과 함동해 피고가 추대돼 그 수장이 됐고 강성택, 추기엽 등의 각 부장과 함께 그 부하를 인솔해 각각 흉기 또는 칼과 검을 휴대하고 미황사 및 대둔사 부근을 배회하다가 일본수비대의 공격을 받았다.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 1910,)'
장흥경찰서장 보고 문건에도 '황준성은 완도군 군내면 죽청리에 유배중, 1909년 6월 수괴 이덕삼의 부장이 돼 활동했다'라고 나와 있는 것을 볼 때, 황준성이 이 무렵 유배지를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 보고 문건에 등장하는 이덕삼은 해남반도에서 200~300명의 대규모 의병을 거느렸던 의병장이었다. 그러나 이덕삼의 부대는 곧 해체되고 황준성 등 휘하 의병장들이 부대를 분리해 관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곧 분진(分陳)을 시도한 것이다.
일본군 의병 토벌기록에 이때의 상황이 자세히 나와 있다.
'수괴 황준성은 부하 9명을 인솔하고 영국제 사냥총 5정, 화승총 6정, 군도를 휴대하고 완도군 고금도 농상리, 조약도 관상리 숙박, 생일도 장도 등을 휘젓고 다녔다. 수괴 유현수는 화승총을 휴대한 부하 10명을 인솔해 황준성과 동행했다.'
각 진의 대장인 황준성, 유현수가 각기 부대를 이끌고 연합작전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분진과 합진을 통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러른 한말 의병부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살필 수 있다.
◆'호남의소' 연합작전서도 활약
한편 당시 남도에는 '호남의소(湖南義所)'라는 의병부대도 있다. 심남일이 조직한 이 의병부대는 사령부가 있는 국사봉을 중심으로 나주, 영암, 강진, 장흥, 해남, 무안, 함평, 보성 등 전남 중남부 곳곳까지 활동 반경을 넓히며, 일본군과 일진일퇴의 전쟁을 치렀다.
심남일은 '서기'라는 직책을 두어 전투 상황을 기록했다. '심남일 실기'는 그의 전투 일지인 셈이다. 여기에 해남 지역 전투 상황도 있으며 당시 이덕삼과 황준성의 활동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해남 성내(城內) 접전. (1909년) 10월 9일,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기세 좋게 출발해 해남 성 밖 10리 지점에 진을 쳤다, 정탐군이 여러 차례 내왕하므로 짐짓 겁내어 위축하는 모양을 보이다가, 밤 10시 무렵 군사를 끌고 성안으로 출동해 들어가서 마구 포를 쏴 왜적 백여 명을 베었다. 이튿날 새벽 전에 대둔사로 퇴진했다.'
해남에서 심남일 의병부대가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고 대둔사로 퇴각했다는 내용이다. 유명한 대둔사 전투를 설명하고 있다. 심남일이 영암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할 때 기군장 직책을 담당한 이덕삼이 있다. 심남일이 해남지역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데는 기군장인 이덕삼의 역할이 있었다.
황준성 의병부대가 최후의 전투를 벌인 심적암지 전경.해남군 제공
대한매일신보(국문판) 1908년 11월 5일자 '의병광장' 난에는 '전라남도에서 온 사람이 말을 들은 즉 해남 등지에 의병이 창궐하는 데 그 의병의 당파는 남일파라 하고 세력이 굉장하다더라'고 적혀있다. 해남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부대가 심남일이 이끄는 의병부대임을 알 수 있다. 역시 같은 신문 1909년 3월 23일 '남일파의 기세' 난에도 '영암과 해남 등 군에는 의병 남일파의 기세가 점점 성해 일인을 보는 대로 죽이는 까닭에 그 지방에는 일본 상인과 거류민이 모두 도망했다더라'고 해 영암, 해남 등지에서 심남일이 이끄는 의병부대 곧 '호남의소'의 기세가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다.
해남이 의병 항전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 데는 해남 일대의 의병부대를 이끌며 심남일이 편성한 연합의병 부대의 기군장 직책을 맡은 이덕삼의 역할이 컸다.
이덕삼 부대는 독립 의진을 이끈 황준성, 추기엽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추기엽은 전주 진위대 소속 군인이었다. 군대 해산 이후 익산 출신의 의병장 윤현보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돼 유형 10년 형을 받고 완도로 귀양 왔었다. 추기엽은 우수영 일대에서 약 1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황준성, 추기엽과 함께 해남 의병의 중심 인물이 황두일이 있다. 황두일은 해남군 북평면 고달동 출신이었다. 그의 휘하에 120명의 의병이 있었다.
황준성 의병부대가 최후의 전투를 벌인 심적암지.해남군 제공
◆두륜산서 맞이한 쓰디쓴 패배
해남 지역에 있는 의병부대는 심남일이 이끄는 '호남의소'와도 연합작전을 전개했다. 심남일의 실기에 나온 해남 성내 전투가 바로 그 대표적 증거라 할 수 있다. '실기'에 언급된 대둔사 전투를 살펴보기로 한다.
1909년 7월 7일 일본 수비대와 황준성, 추기엽 등의 해남 의병부대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해남군 북평면 성도암에서 있었다. 두륜산을 근거지 삼아 곳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이들 의병부대는 미황사로 이동해 전열을 정비한다. 이들은 황준성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곧 연합의진의 사령관이 된 셈이다. 약 70명의 의병부대는 두륜산으로 이동하기에 앞서 일진회원인 박원재와 진태진을 붙잡아 현산면 초평리에서 사살했다. 그리고 7월 8일 대흥사 심적암으로 부대를 이동했다.
7월 8일 심적암에 도착한 의병부대는 현산면 덕흥리 김인옥이 의병들의 사기 앙양을 위해 내놓은 소를 잡아 약주를 한 잔씩 하며 새로운 전략을 논의했다. 황준성은 잠이 들면서 부대의 절반이 되는 30명을 보초로 세워 일본군의 야습에 대비했다. 이날 밤 해남수비대장 요시하라 대위가 이끄는 수비대 22명, 경찰 3명, 헌병 4명 등 30여 명의 일본군이 의병의 뒤를 추격해 대흥사로 출동했다. 경계 근무를 하던 의병들은 새벽에까지 특별한 징후가 보이지 않자 심적암으로 돌아왔다. 이들 뒤를 밟은 일본군 수비대는 새벽 4시 무렵 심적암을 포위하고 집중 공격을 가했다.
기습을 당한 해남 의병부대는 전사자 24명, 포로 8명, 화승종 47정, 군도 5개를 빼앗기는 피해를 입었다. 이때 일본군 공격으로 심적암의 침허당 스님 등 5명의 승려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황준성 의병부대가 최후의 전투를 벌인 심적암지.해남군 제공
탈출에 성공한 황준성은 보성, 순천 등지로 피해 다니다 12월 7일 해남 경찰서에 자수했다. 그가 자수한 것은 부대원들의 희생을 막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1910년 4월 22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형이 교수형이 확정돼 죽임을 당했다. 추기엽도 다행히 탈출에는 성공했으나 7월 29일 부하들에게 피살됐다. 심적암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부하들이 물은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황두일은 8월 30일 부하 8명과 함께 해남 수비대에 자수했다. 황준성과 마찬가지로 후일을 기약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재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해남군은 지난 2019년 발굴 조사와 사료 연구를 통해 심적암지의 건물지 3동, 우물지 1동, 문지 1곳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심적암지가 수행도량에서 항일 의병 전적지로 변화한 과정을 밝혀냈다. 지난 8월 전남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기자 admin@reelnara.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