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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호의 클래식 수퍼스타즈
바이올린 여제 안네 소피 무터. 2023년 줄리아 웨슬리가 찍었다. [사진 안네 소피 무터 공식홈페이지]
지난 반세기 동안 클래식 음악 산업에서 바이올린을 대표한 인물은 1963년 서독 태생의 안네 소피 무터다. 1976년 루체른 페스티벌에 데뷔했으니 내년이면 데뷔
아이씨케이 주식 50년을 맡는다. 무터 한 사람의 커리어를 더듬다 보면 공연·음반 산업의 흥망성쇠가 한 눈에 보인다. “클래식 산업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의 질문에 무터만큼 선명한 답을 줄 음악가도 찾기 어렵다.
도이치그라모폰 레이블 간판이자 정체성
모바일게임 1980년 명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왼쪽)과 안네 소피 무터. [사진 카라얀 공식홈페이지]
바다이야기예시종료 무터의 서사는 언제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으로 시작된다. 1977년 잘츠부르크 성령강림제에 무터를 협연자로 세우면서 “이 아이는 내 유일한 솔리스트”라고 한 게 카라얀이다. 이전까지 기자 출신 부친이 무터의 매니저 역할을 했지만, 이 시점부터 카라얀이 무터의 음악 인생을 제어했
정유관련주 다. 카라얀은 시즌에 소화할 곡목 수와 연습 강도를 세심히 지시했고 악상, 보잉, 운지의 디테일까지 개입해 ‘필연성’의 잣대로 무터 음악을 재정렬했다. 도이치그라모폰(DG) 데뷔 앨범을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녹음했지만 “모차르트 식으론 부족하다. 베토벤적으로 접근하라”는 카라얀의 지시는 ‘형식과 정서의 비례’를 체득하라는 교의였다.
캔들미디어 주식 카라얀은 음악만이 아니라 머리와 드레스까지 코멘트했다. “머리가 셰퍼드 같다”는 말에 헤어스타일을 교정했고, 웨딩숍에서 구한 드레스를 입었더니 “파리의 부띠크에 가서 비싼 드레스를 사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택한 드레스가 지방시와 디올이었다. 특히 존 갈리아노의 디올 드레스는 허리 곡선을 강조하고 양어깨를 드러낸 무터 특유의 비주얼을 완성했다. 1980년대 고화질 영상 시대를 대비한 카라얀의 식견으로 무터는 분방한 10대 소녀에서 불과 5년 만에 여배우의 아우라를 품었다. 오스카 시상식에 나가도 자연스런 모델과 같은 자태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청중은 카라얀의 광채 속에서 어린 무터를 보려 했지만, 소녀는 느린 템포 속에서 밀도를 조율하며 작곡가의 비밀 코드를 섬세한 프레이징으로 비춰내고 자신만의 필치로 밑줄을 그었다. 음악 산업이 마련한 ‘신동의 성공 코스’가 놓여 있었지만, 무터는 ‘카라얀의 발굴’이라는 꼬리표를 넘어서려는 장외 투쟁을 숨기지 않았다. 1993년 내한 독주회 기자회견에서 국내 언론이 카라얀 질문을 집중적으로 던지자 퉁명스럽게 단답으로 일관한 것도 ‘계획된 카라얀 거리두기’의 표현이었다. 1989년 카라얀 사망 이후 십여 년 동안 베를린 필과 거리를 둔 것도 그래서다. 자신과 사자(死者) 카라얀을 동일시하려던 리스너의 흐름을 차단한 것이다.
무터는 전통과 혁신을 동시에 추구하는 DG 이념을 음악 인생으로 구현한, 레이블의 간판이자 정체성 자체다. 노란 자켓의 아카이브를 이끌어가는 동시에, 노장이라면 주저할 ‘옐로 라운지’ 클럽 무대에 과감히 나서 젊은 관객의 청각을 재훈련한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크리스티안 지메르만과 더불어 LP-CD-DVD-블루레이-스트리밍으로 이어진 DG의 매체 변천사를 자신의 해석사와 나란히 증언하는 마지막 세대다. 2018년 레이블 창립 120주년 기념 공연에서 정명훈과 협연한 장면은, 그녀가 왜 이 레이블의 현재진행형 상징인지를 풍경 자체로 입증했다 할 만하다.
무터 음악이 비로소 완성되는 장은 무대 위다.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무터의 음악 세계가 시작된다. 그녀의 독주회는 오디오와 비주얼이 결합된 총체적 예술 현장이며 그 접점을 개척한 프런티어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스트랩리스 가운은 유혹의 코스튬이 아니라, 천과 악기의 마찰을 줄이고 활의 각도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물리학적 선택이다. 디자이너가 누구인지는 부차적 문제다. “빨강은 스트라드와 어울린다”는 발언 역시 취향 고백보다는 톤·홀·조명·시지각이 교차하며 빚어내는 종합 음향에 대한 계산이다.
따라서 무터 공연은 ‘화려하다’는 평가를 넘어, 청중의 감각과 정서를 동시에 자극하는 심미적 에로티시즘에 닿는다. 모차르트 음악을 오디오적으로는 “아름다움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태도로 접근하고, 비주얼적으로는 은근한 요염함을 불어넣음으로써, 무터는 카라얀의 미학을 계승하면서도 단순한 재현을 넘어 자신의 육체성과 감각을 전면에 드러낸 ‘관능적 아름다움’의 극치를 구현한다.
무터는 여러 대 악기를 보유하지만, 주로 사용하는 것은 1710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Lord Dunn-Raven’이다. 그녀 말대로 이 악기는 “필요할 때 포효하는 호랑이”가 된다. 그러나 무터의 강점은 포효의 맹위에 집착하지 않고, ‘필요한 순간’을 판단하는 확고한 시야에 있다. 그녀의 피아니시모가 공기의 밀도를 바꾸듯 청중의 귀에 닿으려면, 작은 소리에 구조를 담는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물어뜯을 때는 필요한 만큼만 울려야 한다. 세계적 경매회사가 새로 출품된 악기 시연을 부탁하는 0순위 연주자이지만, 그녀가 이를 수락하는 일은 거의 없다.
가끔씩 던지는 도발적 언사 역시 그녀의 영향력을 드러낸다. 앤드루 맨지의 바로크 바이올린 연주를 두고 “차고에 페라리가 있는데 왜 폭스바겐을 타나?”라 한 발언은 카라얀의 “자동차는 곧 페라리”를 환기시키며, 취향의 오만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광택·속도·정밀 엔진’으로 음악을 조망하는 그녀의 시야에는 근대 독일인의 테크놀로지적 감각과 미학적 세계관, 스스로 책임질 아름다움의 기준을 긋는 자의식이 담겨 있다. 신시내티 공연에서 무허가 촬영에 분노하며 “스마트폰을 드는 순간, 귀는 소리를 잃는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평생을 걸어 구축한 톤은 엔지니어적 정밀 조합으로 성립하며, 저화질 파일로 유통되는 순간 그것은 예술 파괴라는 확신이다.
두 번의 결혼과 이별의 아픔도 대중 앞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1989년 카라얀의 법률 대리인이었던 데틀레프 분덜리히와 결혼해 두 자녀를 두었으나, 6년 만에 사별했다. 2002년 앙드레 프레빈과 재혼했지만 2006년 이혼으로 마무리됐다. 결혼과 사별, 이혼, 자녀 양육이 음악 해석의 깊이를 만들었다는 시선을 ‘음악만 바라보는 넘겨짚기’라 일축하며 “고통이 반드시 위대한 해석을 낳는 것은 아니다”라고 사생활을 방어했다. 프레빈과 이혼 직후에는 은퇴 의사를 비치기도 했고 “어떤 선택은 반복하지 말아야 할 실수임을 깨닫는다”라고 털어놓았다.
LP~스트리밍 변천사 증언하는 마지막 세대
‘카르멘 판타지’ 앨범 표지. [중앙포토]
무대 뒤에서 엿볼 수 있는 소탈함이야말로 무터의 참모습이다. 무대 위에서는 ‘바이올린 여제’의 자태를 유지하지만, 막이 내리면 곧바로 평범한 어머니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시아 투어 때는 자녀들과 동물원과 놀이공원을 찾았다. 악보를 고양이귀 모양으로 접는 습관 때문에 단원들이 “무터가 쓰던 악보는 귀퉁이나 냄새로도 구분된다”고 농담했다. ‘낮잠을 자야 연주가 잘된다’는 신념 때문에 머리만 닿으면 곧장 잠드는 그녀를 관계자들은 미소로 받아주었다.
데뷔 50주년 프로젝트를 함께할 연주자를 청년에서 고르고 다니엘 뮐러 쇼트, 최예은 같은 무터 음악 재단 출신과 실내악으로 어울리면서 무터는 ‘당대와 동행하는 스타’로 이미지를 갱신하고 있다. 마돈나가 동시대 핫한 남성 보컬과 협업하며 자신을 재포지셔닝했듯, 무터는 청년과 실내악을 함께 하면서 젊음을 수혈하는 동시에 유망 솔리스트가 빠지기 쉬운 독(毒)을 음악적 대화로 해독한다. 다만, 재단 출신 연주자들이 ‘나이든 무터 키드’에 갇히지 않도록, 자신이 한 걸음 물러나야 할 순간을 가늠해야 한다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마흔만 되도 영재 시절의 영광에 안주하며 무대에 서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적지 않다. 그러나 무터는 초로의 나이에도 여전히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녀의 궤적이 언제나 “전통을 기초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연주자”라는 일관성을 지녀왔기 때문이다. 음악 관계자들은 음반 산업의 붕괴와 스타 시스템의 해체를 근거로 “바이올린에서 다시는 무터 같은 수퍼스타는 나오지 않는다”고 단언해왔다.
유튜브가 전곡 감상 행위를 파편화했지만, 무터 이름은 여전히 ‘기다림의 감각’을 불러낸다. 라이브의 위험을 감수하는 해석, 전통과 혁신을 동시에 쥔 큐레이션, 소리와 이미지를 상호 증폭시키는 무대는 사라진 게 아니라 희귀해졌을 뿐이다. 클래식 산업 구조가 변했을 뿐, 구조를 견디고 갱신하는 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타나리라 증명하는 이가 바로 무터다.
한정호 공연평론가·에투알클래식 대표. 런던 시티대 대학원 문화정책 매니지먼트 석사. 발레리나 박세은, 축구인 박지성 등 예술 체육계 명사의 에이전시와 문화정책 자문을 담당하는 에투알클래식 대표를 맡고 있다. 현재 이화여대 경영전문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문화체육관광부 문화다양성위원회 민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